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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재배를 시작하고 나서 생각보다 어려웠던 일이 하나 있습니다.

물을 채우는 것도, 양액을 맞추는 것도, 조명을 관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씨앗을 심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봤습니다.

‘왜 아직 발아하지 않았지?’
‘왜 이렇게 천천히 자라지?’
‘영양액이 부족한 걸까?’
‘조명이 문제일까?’

어제와 오늘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으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깻잎을 보며 또 같은 말을 하고 있을 때 아들이 제게 아주 짧은 한마디를 했습니다.

“하지만 자라고 있잖아요.”

별것 아닌 것 같은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빨리 자라지 않는 것만 보고 있었습니다

초보 농부에게 식물의 하루는 참 깁니다.

씨앗을 심은 다음 날이면 혹시 싹이 나왔나 들여다보고, 아침에 본 식물을 저녁에 다시 보면서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발아가 늦으면 스펀지가 너무 젖었나 만져보고, 잘 자라지 않는 것 같으면 조명을 더 가까이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키운 식물 사진을 찾아보며 우리 집 식물과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저 집은 벌써 저렇게 컸는데 우리 집은 왜 이렇지?’

지금 생각하면 식물을 관찰한 것이 아니라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빨리 발아하기를 기다리고,
빨리 본잎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빨리 커서 수확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미 자라고 있는 모습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다음 단계가 더 크게 보였습니다.

조금씩 커지고 있었는데도 제 눈에는 늘 느리게만 보였습니다.

 

“엄마, 얘네들 많이 컸어요.”

말레이시아 이포에서 보내는 제 아침은 거실 농장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수경재배기 조명을 켜고 잎을 하나씩 들여다봅니다.

그날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깻잎을 한참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왜 이렇게 안 자라지?”

옆에 있던 아들이 깻잎을 보더니 말했습니다.

“엄마, 얘네들 많이 컸어요.”

저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응. 그런데 너무 빨리 안 자라.”

그러자 아들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하지만 자라고 있잖아요.”

그 말을 듣고 잠시 깻잎을 다시 바라봤습니다.

아들의 눈에는 많이 자란 깻잎이 보였는데, 제 눈에는 왜 아직도 작은 깻잎만 보였을까요.

저는 ‘얼마나 빨리 자라고 있는가’를 보고 있었고,
아이는 
‘지금도 자라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식물을 보고 있었는데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아들과 성장 이야기를 나눈 당시 수경재배 깻잎 모습
아들과 성장 이야기를 나눈 당시 수경재배 깻잎 모습

 

다시 보니 정말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다시 식물을 살펴봤습니다.

정말 그대로가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보다 잎이 조금 커져 있었습니다.

가운데에서는 작은 새잎이 올라오고 있었고, 가늘어 보이던 줄기도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매일 보고 있으니 변화가 너무 작아서 제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사진을 며칠 간격으로 비교하면 더 분명했습니다.

그날 갑자기 자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느리다고 생각하던 시간에도 계속 자라고 있었습니다.

식물이 멈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 눈이 큰 변화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아들의 짧은 말이 전혀 다르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자라고 있잖아요.”

그래.

빨리 자라지는 않아도 자라고 있구나.

그날 이후 식물을 보는 제 기준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기다리지 못해서 실패라고 생각했던 씨앗들

생각해 보니 비슷한 일은 이미 여러 번 있었습니다.

깻잎이 발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같은 배지에 다시 깻잎 씨앗을 넣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자리에서 엉뚱한 새싹이 올라왔습니다.

예전에 심어두고 잊어버렸던 페퍼민트였습니다.

씨앗이 워낙 작았고 배지 색도 어두워 페퍼민트 씨앗을 심었던 자리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이미 ‘발아하지 않은 씨앗’이었지만, 페퍼민트는 그 안에서 자기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수도 그랬습니다.

고수 발아에 여러 번 실패했다고 생각한 뒤 베란다 흙에 다시 씨앗을 심었습니다.

한참이 지나도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자 또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약 10일이 지나자 먼저 심어두었던 고수가 흙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내가 실패라고 판단한 시점과 식물이 포기한 시점은 전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씨앗 안에서는 발아를 위한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 시간을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기다리는 것도 식물을 키우는 방법이었습니다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을 때는 잘 키우려면 뭔가를 계속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을 확인하고, 조명을 조절하고, 양액을 살피고, 문제가 보이면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필요한 관리입니다.

하지만 직접 키우면서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발아가 늦다고 씨앗을 계속 건드리거나, 하루 이틀 성장이 느리다고 환경을 계속 바꾸면 오히려 식물이 적응할 시간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씨앗 껍질을 벗지 못한 상추가 걱정돼 계속 신경 쓰다가 물을 과하게 준 적이 있습니다.

도와주려고 한 일이 오히려 어린 새싹에는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문제가 보이면 곧바로 무엇인가를 바꾸기 전에 먼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정말 문제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그저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그리고 가능하면 사진을 남깁니다.

매일 보면 그대로인 것 같은 식물도 일주일 전 사진과 비교하면 놀랄 만큼 달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록은 식물의 성장을 남기는 일이기도 하지만, 조급해지는 제 마음을 붙잡아 주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식물을 보다가 아이를 생각했습니다

그날 이후 아들의 말은 식물을 볼 때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보면서도 가끔 생각났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우리는 자꾸 다음 단계를 기다립니다.

조금 더 어릴 때는
‘언제 이것을 할 수 있을까?’

조금 자라고 나면
‘왜 이것은 아직 못 할까?’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다른 아이와 비교하며 걱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면 아이도 그 시간 동안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았을 뿐, 자기 속도로 계속 자라고 있었습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어느 날 문득 보면 잎이 커져 있습니다.

흙 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데 어느 날 작은 싹 하나가 고개를 내밉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가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장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자라고 있잖아요.”

아들이 그 말을 했을 때는 아마 이렇게까지 깊은 뜻으로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엄마가 “왜 이렇게 안 자라지?”라고 하니, 자기 눈에는 분명 커진 것 같아서 한 말이었겠지요.

그런데 그 평범한 한마디가 제게는 오래 남았습니다.

식물이 마음대로 자라주지 않을 때도 생각납니다.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 생각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가끔 떠오릅니다.

“하지만 자라고 있잖아요.”

꼭 빨라야 자라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제보다 아주 조금 나아갔다면 그것도 성장이고, 겉으로 아무 변화가 없어 보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음을 준비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식물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은 필요한 빛과 물, 영양분을 마련해 주고 스스로 자랄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아이에게도 어쩌면 비슷한 것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재촉해서 빨리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자기 속도로 자라는 시간을 믿어주는 것.

그날 아들이 제게 해준 말은 식물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저 자신에게 해주는 말처럼 느껴집니다.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을 때,
생각만큼 앞으로 가지 못하는 것 같을 때,

저는 그날 거실 농장 앞에 서 있던 아들의 목소리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자라고 있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생각해봅니다.

식물도, 아이도, 그리고 저도.

각자의 속도로 자라고 있으니까요.

 

👩🏻‍🌾 거실농부의 기록

🌱 빨리 자라는 것만 성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아들의 한마디 덕분에 조금씩 자라는 것도 분명한 성장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 “하지만 자라고 있잖아요.” 오늘도 그 말을 기억하며 조금 더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