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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던 우리 집 거실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아이들이 놀다가 수경재배기를 건드렸고, 제가 매일 들여다보던 배지와 씨앗이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습니다.

깻잎 하나 발아시키겠다고 몇 번이나 다시 심고, 아침마다 씨앗부터 확인하던 때라 순간적으로 속상한 마음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날의 사고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아이들이 건넨 그림 한 장 때문이었습니다.

그 그림에는 비를 맞으며 행복해하는 씨앗과 커다란 나무, 그리고 흙 속에 수많은 지렁이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마음이 귀여워 웃었는데 그림을 계속 보다 보니 한 가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지렁이가 많은 흙에서는 정말 식물이 잘 자랄까?”

그리고 그 궁금증은 다시 제가 하고 있는 수경재배로 이어졌습니다.

흙도 지렁이도 없는 우리 집 수경재배기에서는 식물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 걸까?

이번 기록은 거실 바닥에 쏟아진 씨앗에서 시작해, 아이들의 지렁이 그림을 거쳐 흙과 수경재배의 차이까지 알아보게 된 이야기입니다.

 

수경재배 사고, 바닥에 쏟아진 씨앗보다 기억에 남은 것

당시 아이들은 거실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집 안에서 공을 가지고 놀면 무언가를 건드릴 수도 있으니 평소에도 조심하라고 이야기했지만, 결국 이날 일이 벌어졌습니다.

공이 수경재배기 쪽을 건드렸고 그 충격으로 제가 심어놓은 배지와 씨앗이 바닥으로 쏟아졌습니다.

이미 발아한 식물을 넘어뜨린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씨앗 하나하나에도 꽤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어떤 씨앗은 며칠째 발아를 기다리고 있었고, 어떤 것은 겨우 변화가 보이기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깻잎 발아 때문에 여러 번 실패했던 뒤라 배지의 위치가 바뀌거나 씨앗이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게 된 상황이 더 속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충분히 다시 심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거실농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수경재배기부터 확인할 정도로 씨앗 하나에 마음을 많이 쓰고 있던 때였습니다.

결국 저는 아이들에게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한참 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들어오더니 그림을 내밀었습니다.

수경재배 씨앗이 잘 자라길 바라며 아이들이 그린 지렁이와 식물 그림
수경재배 사고 후 아이들이 그려준 씨앗과 지렁이 그림

열 살 첫째가 먼저 그림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식물은 지렁이가 많은 흙에서 잘 자란대요. 그래서 지렁이를 많이 그렸어요.”

그림 속에는 흙 아래에 지렁이가 여러 마리 있었고 비도 내리고 있었습니다. 씨앗 옆에는 음표까지 그려져 있었습니다.

왜 씨앗 옆에 음표를 그렸냐고 물었더니 비가 와서 씨앗이 행복한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씨앗이 나중에는 그림 뒤쪽에 있는 나무처럼 크게 자랄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엄마가 키우는 씨앗도 이렇게 튼튼하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엄마 미안해요.”

아홉 살 둘째도 오빠를 따라 그림을 그리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편지를 적었습니다.

“엄마, 엄마가 키우고 있는 씨 잘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듣는데 조금 전까지 바닥에 쏟아진 씨앗만 보고 있던 마음이 금세 풀렸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기했습니다.

아이들이 제가 매일 수경재배기를 들여다보고 씨앗이 발아했는지 확인하는 모습을 생각보다 자세히 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씨앗을 아끼니까 아이들 나름대로 ‘엄마의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는 그림’을 그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다시 보다 보니 이번에는 제가 궁금해졌습니다.

아이가 식물이 잘 자라라고 그려준 수많은 지렁이.

정말 지렁이가 많은 흙에서는 식물이 더 잘 자랄까요?

 

지렁이 그림, 정말 식물이 잘 자라는 흙을 만들까?

어릴 때부터 지렁이가 있는 흙은 좋은 흙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막연하게 지렁이가 있다는 것은 흙이 건강하다는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그림에 지렁이를 잔뜩 그려놓은 것을 보고 나니 정확히 무엇이 식물에 좋은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지렁이는 흙 속을 이동하면서 통로를 만듭니다. 이런 통로는 토양의 구조에 영향을 주고 물과 공기가 이동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식물의 뿌리 역시 물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흙이 지나치게 단단하게 뭉쳐 있는 것보다 물과 공기가 이동할 수 있는 구조가 중요합니다.

지렁이는 유기물을 먹고 분해하는 과정에도 참여합니다.

낙엽이나 식물 잔재 같은 유기물을 먹은 뒤 배설물을 남기는데 이를 흔히 분변토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여러 영양 성분이 포함되어 있고, 지렁이의 활동 자체도 토양 속 유기물의 분해와 미생물 활동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고 ‘지렁이가 많기만 하면 무조건 식물이 잘 자란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식물이 잘 자라려면 빛과 물, 적절한 온도, 뿌리가 이용할 수 있는 양분 등 여러 조건이 필요하고 흙의 배수성이나 산도 같은 환경도 영향을 줍니다. 지렁이는 이런 토양 생태계 안에서 여러 역할을 하는 생물 중 하나입니다.

그래도 아이가 그린 그림이 완전히 엉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렁이가 활발하게 살아갈 수 있는 흙이라면 유기물이 존재하고 수분이나 토양 환경이 지렁이가 살 수 있는 상태라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지렁이의 활동 역시 흙의 물리적·생물학적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아이가 알고 있던 ‘지렁이가 있는 흙은 식물에게 좋다’는 이야기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알아보다가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집 식물들은 어떡하지?

아이의 그림 속 씨앗은 흙 속에 심어져 있고 주변에는 지렁이가 가득합니다. 비도 내립니다.

반면 제가 키우는 깻잎과 채소들은 흙에 심겨 있지 않습니다.

수경재배기 안에는 지렁이도 없고, 흙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씨앗은 발아하고 뿌리가 자라고 잎도 커집니다.

아이의 지렁이 그림에서 시작한 궁금증은 결국 제가 하고 있는 수경재배의 기본적인 원리로 이어졌습니다.

흙도 지렁이도 없는 수경재배에서는 식물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뿌리로 숨을 쉬는 걸까요?

 

흙 이야기와 수경재배, 지렁이 없이도 식물이 자라는 이유

처음 수경재배를 시작했을 때 저는 사실 이 원리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씨앗을 배지에 넣고 물과 양액을 채운 뒤 LED를 켜주면 식물이 자란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그려준 지렁이 그림을 보면서 흙에서 자라는 식물과 제가 수경재배기로 키우는 식물을 비교해 보니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한 가지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식물은 흙 자체를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를 통해 물과 물에 녹아 있는 무기양분을 흡수하고, 잎에서는 빛을 이용해 광합성을 합니다. 흙은 식물의 뿌리를 지지하면서 물과 공기, 여러 무기양분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수경재배에서는 그 환경을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줍니다.

흙 대신 배지나 포트가 식물을 지지하고, 식물이 필요로 하는 무기양분은 물에 녹인 양액을 통해 공급합니다. 그래서 흙이 없어도 뿌리가 필요한 물과 양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산소는 어떻게 얻을까요?

제가 깻잎 발아 과정에서 이미 여러 번 경험했던 것처럼 뿌리에는 물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뿌리 역시 호흡하기 때문에 산소가 필요합니다.

수경재배 방식에 따라 뿌리 전체가 항상 물속에 잠기지 않도록 하기도 하고, 물을 순환시키거나 에어펌프 등을 이용해 물속의 산소 공급을 돕기도 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수경재배기에서도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물을 많이 주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물과 양분을 얻으면서 산소도 부족하지 않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경재배에서는 양액과 에어펌프가 지렁이를 대신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흙 속의 지렁이는 토양 생태계에서 활동하는 생물이고, 수경재배는 애초에 토양을 사용하지 않고 식물의 뿌리가 필요로 하는 환경을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주는 재배법이기 때문입니다.

둘의 방법은 다르지만 식물이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조건을 생각해보면 연결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뿌리에는 물이 필요하고, 이용할 수 있는 양분이 필요하며, 산소도 필요합니다. 잎에서는 광합성을 할 수 있도록 빛이 필요합니다.

흙에서는 토양이라는 복잡한 환경 속에서 이 조건들이 만들어지고, 수경재배에서는 사람이 물과 양액, 산소 공급, 조명 등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관리하게 됩니다.

아이들이 그려준 그림 한 장 덕분에 제가 매일 보고 있던 수경재배기도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림 속 지렁이가 귀여워서 웃었습니다.

그런데 ‘지렁이가 많으면 식물이 잘 자란다’는 아이의 한마디를 따라가다 보니 지렁이가 흙에서 하는 일도 알아보게 됐고, 결국 제가 하고 있는 수경재배에서는 흙 없이 식물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바닥에 쏟아진 씨앗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는데, 뜻밖에도 이날 제가 얻은 것은 씨앗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 흙 재배와 수경재배, 제가 이해한 차이

식물에 필요한 것 흙에서 키울 때 수경재배할 때
뿌리 지지 토양 배지·포트 등
토양 속 수분 재배수
무기양분 토양 용액 등을 통해 흡수 양액에 녹여 공급
뿌리의 산소 토양의 공극을 통해 공급 수면 노출·물의 순환·산소 공급 등 재배 방식에 따라 관리
햇빛 또는 식물등 햇빛 또는 식물등

※ 흙에서 지렁이는 토양 구조와 유기물 분해 등에 영향을 주는 토양생물입니다. 수경재배의 양액이나 에어펌프가 지렁이를 직접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 거실농부의 기록

🌱 수경재배기에 있던 씨앗이 바닥에 쏟아졌을 때는 그동안 매일 들여다보던 씨앗들이라 속상한 마음부터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제가 식물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그림과 편지를 그려왔다는 것이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 첫째가 식물이 잘 자라라며 흙 속에 지렁이를 잔뜩 그렸습니다. 아이의 말을 듣고 찾아보니 지렁이는 흙 속을 이동하고 유기물 분해에 관여하면서 토양 환경에 여러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 그러다 문득 우리 집 수경재배기에는 흙도 지렁이도 없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습니다. 수경재배에서는 흙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물과 양액, 뿌리의 산소 공급 등을 관리해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것도 이번에 다시 정리해 볼 수 있었습니다.

🌱 무엇보다 이날 알게 된 것은 아이들도 제가 매일 씨앗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닥에 흩어진 씨앗은 다시 심으면 되지만, 아이들이 그려준 지렁이와 행복한 씨앗 그림은 버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